이바닥이 원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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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반역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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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황보영조 옮김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황보영조


이 책은 아주 불편한 책이다.

만약 당신이, 역사의 선순환발전이라든가, 민주주의의 이상론적 목표라든가, 혹은 웹 2.0에서 말하는 참여와 집단지성등의 가치관을 믿고 있다면 페이지마다 불편한 문장들이 가득하다. 아니, 불편하다 못해 분노를 느끼게 되는 문장들로 수두룩하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

대중은 자신의 삶을 우수한 소수로 구성된 상층권위에 맡길 필요가 있다. 우수한 자들이 없다면 인류는 본질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대중이 독자적인 행동을 시도하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는 일이다. 진실로 반역이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거스르는 경우다.

문명의 진보는 문명의 배후를 열심히 배우고 많은 경험을 하는 것, 즉 역사를 배우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역사지식은 새로운 상황에 처한 삶의 갈등에 적극적인 해결책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시대에 범한 순진한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한다. 대중의 행동은 즉흥적일뿐 아니라, 오랜 기억도 역사의식도 없는 사람들에 의하여 좌우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수한 인간은 자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데 반해, 평범한 인간은 뭔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자신에게 만족한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은 대중이 아니라 우수한 인간이다. 우수한 인간은 어떤 탁월한 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지 않을 경우 그 삶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그는 봉사의 필요성을 압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 이런 필요성이 부족할 때 그는 불안감을 느끼며, 자기를 강제할 더욱 복잡하고 힘겨운 새 규범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규율에 따라 사는 삶, 곧 고귀한 삶이다. 고귀함은 권리가 아니라 요구와 의무를 통해 드러난다. 곧 고귀한 의무(Noblesse oblige)이다. “제멋대로 사는 것은 평민의 삶이고 귀족은 질서와 법을 동경한다.”(괴테) 귀족의 특권은 본래 양도나 은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획득된 것이다.

천재는 자신과 바보의 차이가 언제나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는 것에 놀란다. 그래서 눈앞에 닥친 어리석음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런 노력 속에서 지성이 존재한다. 반면에 바보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분별력이 뛰어난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어리석음 속에 부러울 만큼 평온하게 안주한다. 마치 서식하는 구멍에서 곤충을 끌어낼 방법이 없는 것처럼, 바보를 어리석음에서 끌어내어 잠시나마 암흑세계를 벗어나게 하고 습관에 젖어 있는 멍청한 시각을 보다 날카로운 다른 시각과 견주어보게 할 방법은 없다. 바보는 평생 바보고 빠져나올 구멍도 없다. 그래서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는 어리석은 자가 사악한 자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말했다. 사악한 자는 이따금 쉴 때가 있지만 어리석은 자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귀족이란 용어를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현존 상태에서 의무와 요청의 세계로 뛰어드는 용감한 삶과 동의어로 사용한다.

고귀한 삶은 통속적이거나 소극적인 삶과 대조를 이룬다. 소극적인 삶은 외부의 힘이 탈출을 강제하지 않는 한 정지 상태로 자기 자신을 격리시킨 채 언제까지나 그 속에 안주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식의 사람을 대중이라고 부른다. 무리가 많기 때문에 대중이 아니라 소극적이기 때문에 대중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순히 플라톤식 철인정치에 경도된 엘리트주의자의 푸념이라든가, 혹은 시대착오적인 세습귀족예찬론자의 헛소리로 치부하기는 곤란하다. 실제로, 대중에게 권력이 주어진 것을 ‘발전’으로 볼 경우에만 오르테가의 이런 주장이 ‘반동’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르테가는이 책에서, 실제로 대중에게 권력이 주어진 것을 ‘발전’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듯 하다. 이러한 주장은,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대두 등의 강력한 증거로 뒷받침되고 있다.

오해를 피하자면, 오르테가가 말한 “대중은 게으르고, 오만하고, 무지하며 자만에 빠져있다 “라는 명제는, “대중이 그러하다”라는 결과라기 보다는, “그렇기 때문에 대중이다”라는 원인으로 파악해야할 것이다. 또한 오르테가가 말하는 ‘귀족’이란 유럽의 역사 속에 보이는 봉건주의적 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소수 - 고귀한 노력을 거쳐 세계를 변화시키는데 앞장섰던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진정한 사회의 진보는 ‘소수’에 의해 이루어지고, 대중은 그 ‘소수’를 잘 따라올 때 진정한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인데, 한편 오르테가는 이 ‘소수’가 소위 말하는 ‘전문가’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전문가들이란 자신의 전문영역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식자’임에도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는 곳에까지 끼어들어 대중을 오도하는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자유민주주의는 대중들에게 권력을 쥐어줬지만, 대중들은 지금까지의 사회를 발전시켜온 ‘깨어있는 소수’의 합리적 권위를 벗어나는 반동을 일으킨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것은 역사의식과 시대적소명에 대한 반역이나 다름없다는 것이고, 이것이 이 책의 제목 “대중의 반역”의 뜻이다.

글쎄, 아마도 대부분의 좌파적 지식인들, 혹은 시장의 합리성이나 대중권력의 선성을 믿는 이들에게는 이 무슨 말도안되는 소리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국익을 위해 윤리따위는 접어둬도 된다”거나, “내가 재미있게 보았으니 평론가들의 혹평은 가치없다”거나, “XX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 같은 대한민국을 보고 있자면 오르테가의 말에 딱히 반대를 할 명분을 찾기 어렵다.심지어 이런 정치적인 주제와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은 IT쪽에서도 집단지성은 단지 허구일 뿐이다라는 강한 반증이 튀어나오는 바에야, 애초에 대중에게 권력을 주는 것 자체가 과연 올바른 일인가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보게 한다.

물론 이 책을 단순히 대중권력에 대한 반동주장을 담고 있는 책으로 치부하기는 곤란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대중의 반동성을 어떤 식으로 승화시켜 역사의 발전을 향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유럽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그러한 고민에 대한 훌륭한 대안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아쉬운 점은, 오르테가 자신이 처한 시대적, 역사적, 지리적 여건이 그의 이론에 현실적인 제약을 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점. 그가 1930년 스페인 사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여독이 없겠다.

5 Comments »

  민노씨 wrote @ January 17th, 2008 at 12:06 am

때로 너무 훌륭한 서평은 그 책을 읽은 것 같은 착각을, 그러니 그 책을 읽을 필요가 없겠군, 하는 착각을 주는 것 같은데요. 어우야님의 이 서평이 그러네요. : )

말미에 말씀하신 웹2.0(이라는 마케팅용어)에서 떠벌리는 집단지성이니, 참여니 하는 가치가 그저 피상적으로, 그저 기존의 기득권을 좀더 세련되게(물론 그것이 드러나는 양태는 매우 촌스럽지만요) 공고히하려는 위장술로 사용되는 일이 빈번한 우리풍토에서는 여전히 시사점을 주는 책인 것 같습니다.

어우야님 덕분에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p.s.
그런데 어우야님으로 호칭해도 되는건지요?
아니면 이바닥님으로 호칭하는 것을 선호하시는지요?

  민노씨 wrote @ January 17th, 2008 at 12:10 am

아, 그리고…

” 전문가들이란 자신의 전문영역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식자’임에도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는 곳에까지 끼어들어 대중을 오도하는 존재”

그런 의미에서 전문가와 대중(위 가세트 저서에서의 그런 부정적인 의미는 말고 ‘시민’으로서의)을 잇는 가교로서, 전문가의 고양된 지적 가치가 좀더 널리 상식적으로 통용될 수 있도록 (비유하자면) ‘번역’하는 저널리즘의 역할, 그리고 그것들을 훈련하고, 실천하는 블로기즘의 역할은 그래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badac wrote @ January 17th, 2008 at 6:47 pm

어우야로 부르셔도 되고, 이바닥으로 부르셔도 되고… 개인적으로는, “아란아빠”라는 타자적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보고 계신 아란아빠가 옛날의 어우야와 동일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 아닌 걸로 생각해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

블로기즘, 저널리즘.. 뭔 차이랴 싶습니다.
저널리즘도 제대로 훈련되고 바르게 생각하는 진짜 저널리스트들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처럼, 블로기즘도 결국은, 제대로 된 블로그가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 아닌지요. 훈련을 통해 멋진(?) 블로그가가 될 가능성이야 제로는 아니겠으나, 그보다는 처음부터 (절대적이자 상대적으로)가치있는 블로그는 정해져 있다고 봅니다.. 나머지는… 그 가치있는 블로그를 돋보이게 하는 양념이거나, 혹은 그 가치를 묻어버리는 악화로 작용하거나.. 그 둘 뿐이지요.

사실, 블로그를 접었던 이유도, 세상에 쓰레기를 하나 더 보태는 일에 회의가 들어서였고.. 다시 열은 지금 역시, 이 공간은 앞으로 당분간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적일기 수준으로 운영될 겁니다. 어쩌면 민노씨께서 읽을 만한 글은 별로 없을거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

  민노씨 wrote @ January 17th, 2008 at 8:44 pm

어우야(eouia)님으로 호칭하겠습니다.
이 닉네임은 개인적으로 참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온라인실존의 동일성 여유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신, 혹은 유보해달라는 취지는 알듯 모를듯 하지만(제가 어찌 감히 그 모든 미묘한 실존의 떨림을 알수야 있겠습니까만은.. ), 여전히 어우야님이든 이바닥님이든, 아니면 ‘아란아빠’이든… 그 실존이 머무는 풍경의 유사성은 느껴집니다(물론 성급한 억측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요. ^ ^;; )

다소 우울하고 비관적인 전망을 말씀해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인 관점에선 블로그를 통해 서로 다른 의견들을 충돌시키고, 그 충돌에 즐겁게 참여하고, 스스로 ‘쓴다’는 것이 갖는 가치(제가 ‘훈련’이라고 말한 것은 블로기즘이나 저널리즘의 정답이나 전범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그것을 배워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스스로 쓰고, 타인의 가치관, 생각들과 대화하면서 얻게되는 학습효과랄까.. 그런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는 여전히 매우 높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다만 말씀하신 것처럼 “(절대적이자 상대적으로) 가치있는 블로그”는 많은 수가 아니고, 의미가 유통되는 방식은 우려(?)하신 것처럼 “악화로 작용”하는 패턴을 가속화하고 있죠. 가령 그래도 그나마 웹2.0(이 갖는 그 최소한의 취지)에 가깝다는 올블의 연례 이벤트인 ‘올블 top 100 블로그’만 해도 그 “악화”의 흔적들은 깊은 것 같습니다.

모쪼록 사적 일기이든 공적인 이슈에 대한 참여이든, 글 많이 써주시면 애독자로서의 즐거움이겠습니다.

  민노씨 wrote @ January 17th, 2008 at 8:47 pm

p.s.
오타가 있네요. 동일성 ‘여부’.. ^ ^;;
그리고 하나 여쭤본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트랙백은 불가능한지요?
물론 댓글에 링크 입력하는 수동트랙백으로 대체하면 그만이긴 하지만요.
딱히 트랙백을 닫아주신 취지가 계신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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